1)
주계나의 독백
내가 왜 한국을 떠나느냐고?
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.
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선 더 이상 못 살겠어서.
무턱대고 욕하진 말아줘.
내가 태어난 나라여도 싫어할 수 있는 거잖아.
...
내가 한국에서 못 살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
한국에서 나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야.
멸종되어야 할 동물 같다고나 할까?
추위도 너무 잘 타고,
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,
물려받은 건 개뿔도 없는데,
까다롭기는 또 드럽게 까다로워요.
아프리카 초원 나오는 다큐멘터리에
맨날 표범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지?
톰슨가젤.
걔네들 보면, 표범이 올 때 꼭 이상한 데로
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?
내가 꼭 걔 같아.
남들 하는 대로 하지도 않고
여기는 그늘이 졌네, 저기는 풀이 질기네 하면서
무리에서 떨어져 나와있다가
맹수의 표적이 되는 거.
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
표범이 오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.
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봐야지.
그래서 결심한 거야.
한국을 뜨기로.
2)
계나와 남자친구 지명의 대화
계나:
좀 버텨보다가 안 되면
진짜 (직장) 그만둘 거야.
지명:
그만두면?
계나:
이참에 한국 떠야지.
지명:
무슨 소리야?
계나:
지금 내 결론은
한국에선 비전이 없다는 거야.
지명:
계나야, 한국이 아무리 불평등하다
하더라도 열심히 사는 사람한테
대한민국만큼 기회의 땅도 없어.
구매력으로만 따져도 1인당 GDP
20위권에 있는 나라라고.
스페인이나 이탈리아하고도 별반 차이 없어.
계나:
너 기자 시험 준비하더니 상식이 많이 늘었네.
야, 그렇게 살기 좋은 나라면 OECD 국가 중에
자살률 1위인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?
나는 그냥, 하...
좀 인간답게 살 수 없나,
그런 걸 고민하는 중이야.
지명:
오케이, 네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잘 알아.
근데, 외국 나가면 뭐 천국일 거 같아?
한국에 사는 동남아 사람들 봐봐.
그 사람들 자기 나라에서 일류대학 나왔어도
여기선 일용직밖에 못 하잖아.
그런 애들이 진짜 행복해 보여?
계나:
너 지금 동남아 사람들 모욕하는 거야.
네가 뭔데 그 사람들 행복을 함부로 평가하냐?
무슨 기자 되고 싶다는 인간이 말을 그따구로 해?
...
지명:
도대체 한국이 싫은 이유가 뭐야?
계나:
난 잘못한 게 없는데
내 인생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니까.
이렇게 살다가는 자살하거나
암에 걸려서 죽거나,
둘 중 하나야, 분명해.
지명:
그러면 외국 나가면 좀 나아질 것 같아?
계나:
너 자꾸 날 무슨 외국병 걸린 사람 취급하는데,
나 아주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중이야.
3)
계나와 친동생 미나의 대화
계나:
같이 뉴질랜드에 갈래?
미나:
뉴질랜드?
그거 뭐 네덜란드 옆에 있는 건가?
계나:
있어...
남쪽인데, 여기보다 훨씬 따뜻하대.
시급도 세고.
4)
계나와 아르바이트 동료 앨리의 대화
계나:
아까는 고마웠어.
앨리:
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.
부당한 대우를 지적했을 뿐이니까.
빌어먹을 인종차별주의자!
계나:
난 계나야.
앨리:
난 앨리.
계나:
넌 어디 출신이야?
앨리:
출신이 어디냐고?
여기 (뉴질랜드) 우리 땅이야.
자신을 지키려면 절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돼!
계나:
그거 혹시 마오리식 대처법 같은 거야?
앨리:
아니, 세계 표준이야.
...
앨리:
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딱 하나야.
뚜렷한 목표 같은 게 있으면 좋겠지만
없어도 괜찮아.
아무도 쫓아오지 않으니까.
도망갈 필요 없어.
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.
그래도 불안하면 위험을 감수해.
모험은 위험할수록 좋거든.
5)
계나와 친구 리키의 대화
리키:
갈 수 있다면, 한국에 가보고 싶어.
계나:
그래?
한국은 지옥인데도?
우리는 헬조선이라고 불러.
리키:
진짜?
내가 가면, 지옥을 보는 건가?
재밌네!
계나:
한국 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해.
죽을 때까지 일을 하지.
리키:
맞아.
한국 사람들은 살려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
일하려고 사는 것 같아.
내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은
계급과 서열로 사람들을 나눠.
제일 위에 뉴질랜드인과 서양인이 있고
그다음에 일본인과 한국인,
그 아래는 중국인,
그리고 저 밑에 동남아인이 있어.
여기 (뉴질랜드) 사람들?
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도 못해.
걔네 눈엔 우린 어차피 다 똑같아.
6)
계나와 미나, 미나의 남자친구 홍원의 대화
홍원:
아, 그 뉴질랜드는 어딨죠?
네덜란드 옆에 있나?
미나:
그, 호주, 호주 옆에 있는 거.
- 한국이 싫어서 (2023) 중 -
원작
장강명 <한국이 싫어서, 2015>
각본 / 감독
장건재